원주사람의 일상 속 치악산. 사계절이 머무는 그곳에서
강원도 원주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도시입니다. 서울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이 도시는 첩첩이 둘러싼 산세와 맑은 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일상으로 가득하죠. 그 중심에는 치악산이 있습니다. 원주사람이라면 누구나 삶 속에서 한 번쯤 치악산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는, 그중 한 사람입니다.
치악산은 원주의 뒷산이 아닙니다. 삶입니다.
치악산은 해발 1,288미터.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닙니다. 하지만 원주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이름입니다. "오늘 치악 갈래?"라는 말은 단순한 등산 초대가 아닙니다. 마음 정리의 시간, 건강을 위한 움직임, 때로는 소주 한 병을 품고 올라가는 사색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치악산은 국립공원이지만, 지역민에겐 뒷산처럼 친숙한 존재입니다. 황골 입구에서부터 비로봉까지 이어지는 길은 이미 수십 번을 걸었고, 때로는 귀래 방면에서, 때로는 구룡사에서 올라갑니다. 계절마다 표정이 다르고, 같은 길도 늘 다르게 느껴지지요.
봄날의 치악산 – 진달래 핀 능선, 설렘을 닮다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면 치악산은 진달래와 개나리로 물듭니다. 특히 향로봉 방향으로 걷는 길은 진달래 군락지가 많아 분홍빛 물결이 장관을 이룹니다. 길고 긴 겨울을 지나 따스한 봄볕을 얼굴에 받으며 걷는 기분, 그것만으로도 삶에 색이 들어옵니다.
여름 치악산 – 초록의 숨결 속으로
비가 오는 여름날의 치악산은, 그야말로 생명이 들끓는 숲입니다. 미끄러운 돌길을 조심하며 비로봉까지 오른 뒤, 흐르는 땀을 식히는 바람 한 줄기가 그렇게 값질 수 없습니다. 여름 치악산의 초록은 시선을 빨아들입니다. 휴대폰 카메라로는 담을 수 없는 밀도, 숨결, 살아 있는 냄새. 그 모든 것이 여름 치악산입니다.
특히 계곡물이 흐르는 구룡사 입구 쪽은 피서지로도 제격입니다. 등산은 부담스럽고, 그냥 쉬고 싶은 날엔 텐트를 펴고 돗자리를 깔아 한나절을 보내기 딱 좋죠.
가을 치악산 – 단풍의 정점에서 인생을 보다
10월 말, 치악산은 단풍의 절정에 이릅니다. 오색보다도 붉고, 설악보다도 선명하다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 펼쳐지는 단풍 능선은 일상에 지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특히 구룡사 쪽 단풍은 워낙 유명해 사진 작가들도 자주 찾습니다. 이맘때는 원주 시민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오지만, 저는 조용한 평일 이른 아침을 노려 올라갑니다. 정적 속에서 마주하는 붉은 숲.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겨울 치악산 – 침묵과 흰 눈의 나라
겨울의 치악산은 말 그대로 장엄합니다. 하얗게 눈 덮인 능선, 발끝에서 느껴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위, 그리고 맑은 날이면 멀리 태백산 줄기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체력적으로는 가장 부담스럽지만, 이맘때의 산행은 자신과의 싸움이자 묵상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처음 치악산을 겨울에 오른 날, 비로봉 정상에서 본 해돋이는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붉은 빛이 수평선을 뚫고 솟아오를 때, 제 가슴도 함께 뛰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또 한 번 이 산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원주사람에게 치악산은 무엇일까?
저에게 치악산은 단순한 등산지가 아닙니다.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소풍을 갔던 곳, 고등학교 시절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홀로 걸었던 길, 연애 시절 손을 맞잡고 나란히 걸었던 능선, 그리고 지금은 삶의 페이스를 다시 찾고 싶을 때 찾아가는 쉼터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도 그런 ‘산’이 하나쯤은 있지 않나요?
그리고 그 산이 바로 치악산이라면, 우리는 이미 친구입니다.
왜 치악산 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원주에 산다면, 오늘 퇴근길에 한 번 치악산 입구를 걸어보세요.
혹은 아직 치악산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번 주말에 기차표를 끊고 원주로 내려오셔도 좋습니다.
그저 산을 오른다기보다는, ‘삶과 마주한다’는 마음으로 걷는다면, 치악산은 그 마음에 반드시 응답해줄 겁니다.